지난 8월 23일, 경기도 파주 금촌에 위치한 파주이주노동자센터 ‘샬롬의 집’에서 특별한 언어 수업이 열렸다. 이날은 ‘난나뮤직 스페셜데이’로, 이주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음악 공부방 ‘난나뮤직’(대표 고유정)이 마련한 다양한 문화 체험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이번 행사는 파주시 마을공동체 ‘료리조리남북먹거리’(대표 지은영)와 스리랑카·미얀마 공동체가 함께 참여한 ‘스리랑카어 배우기’ 시간으로, 참가자들은 총 60개에 달하는 스리랑카 문자의 일부인 자음 42개와 모음 4개를 배우며, 언어와 문화를 나누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마치 예술작품처럼 아름다운 글자를 가르쳐준 이는,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스리랑카 출신의 여성으로, 파주에서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따뜻한 미소와 섬세한 설명으로 교실을 가득 채웠고, 참가자들은 “언어는 달라도 마음은 통한다”는 사실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이주노동자에서 이주가정으로… 변해가는 지역의 풍경
샬롬의 집에는 스리랑카뿐 아니라 미얀마, 캄보디아, 태국 등 여러 국가 출신의 이주노동자 가족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 과거에는 단신으로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지역사회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주가정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이 따뜻한 공동체 안에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들’, 바로 미등록 이주아동들의 현실은 여전히 외면받고 있다.
“한국에서 자랐지만, 한국인이 될 수 없는 아이들”
현재 대한민국에는 약 2만 명의 미등록 이주아동이 거주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대부분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 한국에 입국하거나, 한국에서 태어난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의 친구들과 어울려 성장해왔지만, 법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로 분류된다.
법무부는 2025년 2월까지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이들에게만 체류 자격을 부여하는 한시적 구제 방안을 내놓았지만, 대상자는 고작 100~500명, 전체의 10% 미만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15년 이상 거주했으며, 중·고등학교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자’라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이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아이들은 여전히 추방의 위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단지 ‘외국인’이 아닙니다… 이들은 이미 우리 사회의 구성원입니다”
샬롬의 집에서 만난 아이들은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그들은 한국의 학교에 다니고, 친구들과 놀고, 한국 사회의 가치와 문화를 배워가고 있다. 이들을 출신 국가로 되돌려보내는 것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게다가, 아이들의 ‘본국’은 이들에게는 오히려 낯선 공간일 수 있다. 언어도, 문화도, 사회적 기반도 없이 내몰리는 이 현실은 아이들의 미래는 물론, 한국 사회의 다문화 수용성에도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출생등록과 기본권 보장부터 시작해야”
미등록 이주아동은 인권의 관점에서 가장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다. 출생 등록이 되지 않아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교육·의료·복지 등 다양한 기본권 보장에서도 소외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한 국가로서, 모든 아동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할 책임이 있다. 출생통보제 도입과 함께, 미등록 이주아동에게도 최소한의 체류 자격과 사회적 보호를 제공하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세계인권선언 제25조 2항에서는 "모든 아동은 적서에 관계없이 동일한 사회적 보호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국제적 책무이기도 하다.
미래를 위한 투자, 그리고 더 나은 공존의 시작
저출산·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 사회에서, 이주아동은 단지 보호의 대상이 아닌 미래의 시민이자 노동력이다. 이들이 벌어들이는 소득과 소비는 국내 경제로 순환되며, 오히려 국가적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들은 ‘외국인’이 아닌, ‘이 땅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이들의 삶을 인정하고,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방향이다.
샬롬의 집에서 열린 작은 언어 수업처럼, 함께 배우고 이해하며 살아가는 방식은 이제 지역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