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교하동에 독립운동의 숨결이 서린 공간이 있다. 교하초등학교 앞, 임명애 선생 추모비와 바로 그 아래 위치한 옛 교하파출소 부지가 그것이다. 이곳은 1919년 3월 26일, 임명애 선생과 수백 명의 교하 주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항일운동의 현장이다. 그러나 최근 이 부지가 개인에게 매각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지역의 소중한 역사적 기억이 훼손될 위기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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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명애(1886~1938) 선생의 얼굴을 새긴 부조와 함께 교하 3·1운동의 의미를 기록한 안내비. 파주 여성 독립운동가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
파주 여성 독립운동가 임명애 선생
임명애(1886~1938) 선생은 파주 와석면 교하리 출신으로, 구세군 신앙인으로 활동하며 지역 청년과 학생들을 조직해 파주 최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현 교하초등학교)에서 학생 100여 명과 함께 파주의 첫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월 25~26일, 격문 60여 매를 인쇄·배포하고 700여 명을 모아 면사무소와 주재소로 향하다 체포됐다.
임신 중에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출산 후 아기와 함께 다시 입소해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유관순 열사와 같은 방에서 생활하며 마지막을 지켜본 증언자이기도 하다.
출소 후에도 항일정신을 굽히지 않았던 선생은 1938년 향년 52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며 그녀의 헌신을 기렸다. 영화 〈1919 유관순〉에도 등장할 만큼, 한국 여성 독립운동사의 상징적 인물이다.
파주 3·1운동의 전개와 희생
파주의 만세운동은 교하에서 시작해 인근 지역으로 확산됐다.
3월 27일, 청석면 심학산에서는 학생과 주민 수백 명이 시위를 벌이며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향했다.
3월 28일, 봉일천 장날에는 3천여 명이 모여 파주 최대 규모의 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이날 일본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과정에서 확인된 피검자만 21명, 사망자 10명에 달했다. 학생·농민·종교인 등 사회 각계가 자발적으로 참여해 일제의 무단통치 기관을 직접 공격한 점에서, 파주 3·1운동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격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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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교하초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파주교하 3·1운동 기념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019년 건립됐다. |
기념비와 현장, 함께 지켜야 할 역사
오늘날 파주에는 세 곳의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교하초등학교 교정 내 파주교하 3·1운동 기념비(2019년 건립)
광탄면사무소 내 3·1운동 발상비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 3·1운동 기념비
그러나 기념비와 맞닿은 핵심 현장, 교하파출소 부지는 개인 소유로 넘어가면서 보존의 위기에 처했다. 교하동 주민 김광태 씨는 본지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추모비는 기억의 상징이고, 파출소 부지는 그 기억의 실체입니다. 둘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역사입니다. 파주시는 교하초등학교를 미래유산으로 지정한 만큼, 교하파출소 부지도 반드시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해야 합니다.”
그는 이어 “임명애 선생 유적지를 시민들이 찾는 역사교육 공간, 항일정신의 기념관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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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하 만세운동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끌려갔던 옛 교하파출소 전경. 현재는 역사적 보존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
역사를 지킬 것인가, 잊을 것인가
파주는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현장을 품고 있는 도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지키는 도시로 남을 것인가, 개발 논리에 밀려 현장을 잃는 도시가 될 것인가.
100년 전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고 있다.
“역사를 지킬 것인가, 잊을 것인가.”
https://youtu.be/VpAPskEvCz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