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돌사신 [曲突徙薪] 曲 : 굽을 곡 突 : 굴뚝 돌 徙 : 옮길 사 薪 : 땔나무 신
  •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뜻이다.
  • 곡돌사신 [曲突徙薪] 曲 : 굽을 곡 突 : 굴뚝 돌 徙 : 옮길 사 薪 : 땔나무 신 

     "재난현장 인증사진 없는 자들은 모두 죄인" 불은 고함으로 잡히지 않고 재난은 굴욕으로 수습되지 않는다.
    지금 파주에 필요한 것은 목소리만 큰 ‘버럭 정치’가 아니다. 사고가 터진 뒤 카메라 앞에 서는 정치가 아니라, 눈에 띄지 않더라도 위험을 미리 막고 불편을 줄이는, 소리 없이 강한 정치다. 시민의 고통을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들려한다는 오해받지 않기를, 그리고 재난 앞에서 양심을 증명하라 강요하는 또 다른 후미에가 이 땅에 다시 놓이지 않기를 바란다.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아궁이 근처의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뜻이다.《한서(漢書)》 〈곽광전편(藿光傳篇)〉에서, 길 가던 한 나그네가 한 집 앞을 지나면서 우연히 그 집의 굴뚝을 바라보았더니 굴뚝은 반듯하게 뚫려 있고 곁에는 땔나무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나그네는 그걸 보고 주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굴뚝의 구멍을 꼬불꼬불하게 만들고, 땔나무는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주인은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집에 큰 불이 났다.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해 집 주인을 구해 내었고 다행히 불은 집을 다 태우지 않고 진화되었다.

    이웃들이 자신의 생명을 구해 준 데 대한 감사로 그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음식과 술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그때 한 사람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때 당신이 그 나그네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이 날 일도 없었거니와 이렇게 술과 고기를 낭비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하면서 "굴뚝을 꼬불꼬불하게 하고 땔나무를 옮기라고 말한 나그네에게는 은택이 가지 못하고 머리 그슬리고 이마를 데며 화재를 끈 사람은 상객(上客)이 되었군요[曲突徙薪無恩澤 焦頭爛額爲上客耶]"라며 말을 이었다. 곡돌사신은 화근에 대비하여 미연에 방지한다는 뜻 외에 화재의 예방책을 얘기한 사람은 상을 받지 못하고, 불난 뒤 불을 끈 사람이 상을 받는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제260회 파주시의회 제2차 정례회 본회의에서는, 지난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약 36시간 이상 이어졌던 대규모 단수 사태에 대한 시정 질의와 답변이 이어졌다. 박은주 시의원은 본회의 질의에서 ‘사고 초기 약 9시간의 시장 지휘 공백’을 포함해 총 7개 항목을 지적하며 행정부를 강하게 질타했다. 파주시장은 다시한번 고개를 숙였고, 배석 실국장들은 멍하니 모니터만 응시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단수 사태 이후, 일부 정치권에서 쏟아진 말들은 문제 해결을 향한 질문이라기보다 양심을 시험하는 구호에 가까웠다.
    단수 고통을 격지 않은 필자는 “너희는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느냐”, “세월호를 잊었느냐”는 질책으로 느껴져 질의 내내 불편했다. 시장과 공무원들은 복구의 주체가 아니라 심판대에 오른 피고인이 됐다. 그 질문들 속에는 사실을 밝히려는 냉정함보다, 고개를 숙이게 하려는 압박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질문은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질문이 책임 규명이 아니라 굴복을 요구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17세기 일본 에도 막부는 가톨릭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후미에(踏み絵)라는 잔인한 도구를 사용했다.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형상을 새긴 목판을 바닥에 놓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했다. 끝내 발을 들이지 못하거나, 잠시 망설이거나, 고개를 숙이는 행위조차 ‘유죄의 증거’가 됐다. 후미에는 신앙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라, 양심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시험이었다.

    지금 일부 정치의 언어가 닮아 있는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왜 즉각 답하지 않았느냐”, “왜 확답을 주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상황의 복잡성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잠시의 망설임조차 책임 회피로 단죄하려는 프레임으로 작동한다. 현장의 혼란, 판단의 어려움, 잘못된 정보가 더 큰 재난을 부를 수 있다는 경계는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정치. 설명을 듣기보다 자백을 강요하는 정치.

    그 속에서 공무원은 시민을 위한 판단 주체가 아니라, 언제든 정치적 공격의 대상이 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예방과 숙고는 죄가 되고, 확신 없는 정직함은 무능으로 낙인찍힌다. 그렇게 행정은 침묵을 배우고, 책임은 점점 회피된다.

    재난 앞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실수가 아니라, 실수를 두려워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다. 후미에 앞에 선 사람들이 침묵 속에서 발을 내디뎠듯, 공직자들이 정치적 재단을 우려해 말을 아끼는 순간,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양심을 증명하라는 정치가 아니다. 잘못을 정확히 묻되, 판단의 시간과 구조적 문제를 함께 성찰하는 정치다.

    불은 고함으로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재난은 굴욕으로 수습되지 않는다.

    파주가 다시는 같은 위기를 겪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후미에가 아니라 곡돌사신의 자세다. 밟으라고 내미는 질문이 아니라, 불이 나지 않도록 묻는 질문. 그 정치적 성숙함이 지금, 시민의 일상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 글쓴날 : [25-12-09 05:09]
    • 내종석 기자[pajuo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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