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파주가 아니더라도 오래 전 접경지역에 살아 본 사람들은 ‘삐라’에 대한 이런 저런 추억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문산도 그랬다.
주로 겨울철에 많았다. 북서풍이 부는 겨울이 북쪽에서 날려 보내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리라. 한겨울 학교 가는 도중 하얗게 무서리를 뒤집어쓴 채 반짝 거리며 논바닥을 덮고 있던 ‘삐라’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 시절 실생활에서는 접해보기도 힘든 고급 진 종이에 새겨진 현란하고 흉측한 온갖 그림들을 보자면, 반공교육의 효과에 가득 찬 어린 심성은 두려움에 떨었다.
고정간첩이니 무장공비니 하는 이야기가 늘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고, 아침 일찍 산을 다니는 사람은 거의 간첩 취급을 해서 신고를 해야 했다.
그 시절 실제로 간첩신고 매뉴얼에는 아침 이른 시간에 산에서 내려오거나, 바지에 물기가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신고 대상이었다.
미술시간에 북한을 그리면 의례히 머리에 뿔나고 군복에 ‘따발총’을 든 모습만을 그릴 때였다.
그런 무섭고 음습한 존재들의 손길이 그 ‘삐라’에 미쳤을 수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려웠다.
그렇게 두려운 한 편으로 ‘삐라’는 연필 한 자루였고 공책 한 권이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삐라’를 주워 다가 파출소에 갖다 주면 연필이나 공책 한 권을 보상으로 주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연필이나 공책이 귀했던 그 시절이었다. 파출소에 갖다 주면 조금 갖다 주나 많이 갖다 주나, 돌아오는 보상은 늘 연필 한 자루나 공책 한 권이었기에 나중에는 친구들과 나누어서 갖다 주기도 했다.
북한에서만 보내는 것으로만 알던 그것을 남쪽에서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삐라’를 주워 가지고 파출소에 갔을 때 순경 아저씨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얀 마. 이건 무효야 무효”라고 하면서 연필을 주지 않았을 때부터였다.
그 다음 부터는 ‘삐라’를 주으면 내용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내용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당연하게 ‘북한괴뢰’의 짓으로 알았기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매우 ‘나쁜 짓’으로 교육 받았던 터이기에 ‘대한민국’이 그런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커다란 의문을 품었다.
나쁜 짓은 늘 북한의 몫이었고 우리는 그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물어 볼 엄두도 안 나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터라 의문은 내 가슴 한편에 늘 남아있었다.
그 다음부터 ‘삐라’는 연필 한 자루나 공책 한 권의 가치가 있었지만 주워서 들여다보지 않게 되었다. 그 것을 어느 편에서 뿌린 것인지 확인하는 것도 두려웠고, 우리가 뿌린 것이라면 ‘대한민국’이 그런 나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 하는 것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편향된 ‘애국주의’와 ‘반공교육’의 한 결과물이었다.
그 시절 문산은 대남방송과 대북방송 소리가 엉켜서 늘 ‘웅웅’하는 소리와 임진강 건너편으로 떨어지는 포사격 소리, 주위에 산재한 군부대에서의 총소리, 미군부대 탱크의 캐터필러 소리,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양색시’들의 웃음소리가 뒤 엉킨 곳이었다.
그런 불쾌한 추억을 다시 소환하는 일이 요즘 벌어지고 있다. 소수의 탈북자 단체가 북한을 비방하는 ‘삐라’를 북한으로 보내자 북한 또한 우리를 비방하는 ‘삐라’를 보낸다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 행위에 어떤 ‘정당성’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삐라’를 보낸다는 것은 엄연히 ‘군사행위’이고 적대를 공식화하는 것이다. 북한이 비록 지금은 ‘적’의 지위에 있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적’일 수는 없는 것이고 ‘적’이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북한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화해와 공존이 그 답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전쟁의 참화로 얼룩진 6, 70년대의 ‘문산’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